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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어머니는 동래부 관기였고, 장영실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중국 소주, 항주 지방 출신의 원나라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실록에는 1423년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며, 이후 행사직(行司直), 1434년 호군(護軍) 등의 직책을 거쳐 1438년 대호군(大護君)까지 오른다. 그리고 장영실이 만든 임금의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파직된 것이 1442년이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 기록을 토대로 장영실의 출생 시기는 1385~1390년생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장영실은 금속 제련, 성곽 축조, 농기구, 무기 수리 등에 탁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래현이 가뭄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차(오늘날로 따지면 양수기 펌프 비슷한 기구)를 개발해내어 동래현에 들었던 가뭄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세종에게 보고 되어 한양으로 불려갔다고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연려실기술에 있는 기록이며 태종실록에서부터 장영실이 등장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아 세종대왕의 어명에 따라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명나라로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과학자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농학,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세종 2년(1420)에 역관 윤사웅이 지진과 혜성을 관측하자, 세종은 그 공을 높이 사 나양 부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때 함께 천체를 관측한 이무림과 최천구 등도 수령으로 임명했는데, 신하들은 중인에게 부사 벼슬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뜻을 꺽지 않음으로써 과학자를 아끼고 과학을 발전시키려는 마음을 뚜렷하게 밝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계가 만들어진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백제 장인이 왜에 가 물시계(660년)와 천문대(675년)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라는 역사 기록을 통해 일본보다 먼저 시계를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고려시대에도 시계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서운관처럼 하늘을 관측하고 시각을 기록하는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시계가 잇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물시계, 해시계 같은 여러 시계가 있었습니다.

 

세종 14년(1432), 장영실은 이천 등과 간의를 발명하고 궁궐에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를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이순지는 조선의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천재 천문학자입니다. 어느 날 세종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한성의 위도를 묻자, 그 당시 천문학을 연구하지 않았던 이순지가 북위 약 38도라고 대답해 세종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순지는 천문학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이순지는 장영실이 천문 기기를 만들 때 이론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으며 역법서인 ((칠정산내외편))과 ((교식추보법))을 지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하루를 12시 100각으로 나누었습니다. 시는 24시간을 12로 나눈 것인데, 앞의 1시간을 초, 뒤의 1시간을 정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12시를 십이지를 상징하는 동물의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각은 24시간을 1/100로 나눈 것으로 14분 24초입니다. 효종 4년(1653)부터는 24시간을 12시 96각으로 나눠 1각이 15분이 됐습니다. 한편 해가 진 뒤부터 뜨기까지(반 7시~새벽 5시)를 다섯으로 나눠 1경, 2경, 3경, 4경, 5경이라 했습니다. 경도 다섯으로 나눠 1점, 2점, 3점, 4점, 5점이라고 불렀습니다.

 

세계 최초의 우량계는 1441년에 조선에서 만들어 졌습니다. 1639년에 이탈리아의 과학자 카스텔리가 만든 서양 최초의 우량계보다 약 2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습니다. 측우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비 온 뒤 빗물이 땅에 스며든 정도를 재서 비의 양을 짐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흙의 종류에 따라 빗물이 젖는 정도가 달라 정확한 자료를 얻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측우기가 만들어 진 뒤로는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양을 재 비교적 정확한 강수량을 알수 있었습니다. 또 하천이나 저수지 등 물의 높이를 재는 측량기구인 수표를 만들어 홍수에 대비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한 공을 크게 칭찬하며 장영실을 상호군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1442년에 세종은 장영실이 만든 가마를 타고 온천 여행을 나섰다가,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장영실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아 결국 장영실은 이 일의 책임을 지고 곤장 80대를 맞고 궁궐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위와 같이 조선의 발명왕 장영실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인 장영실과 여러과학자들의 과학기술을 본받아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으뜸이라 할수 있는 과학기술이 발전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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