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을 연구하고 이끌어 낸 최고의 조선시대 명의들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중인은 의원, 역관, 기술관, 지방 관아에서 사또를 돕는 향리, 서얼(본부인이 아닌 첩의 자식(서자)및 그 자손)등이었습니다. 의원 역시 중인이 하던 일로 사람을 살리는 귀한 일을 했음에도 높이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의원 중에는 양반도 있었으나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습니다.
허준은 아버지는 용천 부사를 지냈으나 서자로 중인 신분이었습니다. 허준이 편찬한((동의보감))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서를 모아 엮은 의학서입니다. 내경(내과), 외형(외과), 잡명(전여병, 산부인과, 소아 청소년과 등) 탕액(약), 침구(침과 뜸), 이렇게 5가지 부분으로 나눠 각 병마다 진단과 처방을 내려 25권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당약 대신 향약을 권하고, 탕액 편에선 수백 종의 향약명을 한글로 적어 사용이 편리하도록 했습니다.
((의방유취))는 세종 27년(1445)에 만들어진 동양 최대의 한의학 백과사전이였습니다. 원래 365권이었던 것을 266권으로 간추려 성종 8년(1477)에 30질을 인쇄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으나, 당시 왜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빼앗아 간 252 책이 현재 일본에 있습니다. ((의방유취))에 인용된 책 가운데는 중국에서도 이미 사라진 의서 40여 권이 들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지으면서 많은 내용을 ((의방유취))에서 인용했습니다.
((동의보감))은 우리의 전통 의학을 정립한 것으로 의료지식의 민간보급에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서의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실학자 박지원은 청나라에 갔다가 중국어판((동의보감))을 사오고 싶었으나 너무 비싸 사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중국어판 머리말에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함께 나눠야 한다'라고 출판 이유를 밝힐 만큼 중국 사람들은 ((동의보감))을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또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다른 선물은 마다해도 ((동의보감))은 꼭 가져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명의하면 흔히 허준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허준 말고도 백성들의 목숨을 구한 명의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전순의 임언국, 강명길, 유이태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전 순의는 세종. 문종. 세조 세 임금을 모시며 전의감에서 의관으로 일했는데, 1445년(세종 27)에는 왕명에 따라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김의손과 함께 침과 뜸으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인 침구술을 담은 ((침구택일편집))이란 책을 편찬했으며, 1460년(세조 6))에는 식이 요법을 정리한 ((식료찬요))를 엮었습니다. 임언국은 명종 때의 의원인데, 늙은 스님으로부터 침술을 배워 많은 사람들을 살려 냈습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를 예빈시(조선시대에 왕실과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던 관청)주부로 삼았고, 임언국은 1559년(명종 14)에 종기 치료 방법을 담은 ((치종비방))을 써서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강명길은 영조 때 내의원 의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1794년(정조 18)에 수의가 되었습니다. 1799년(정조 23)에는 ((동의보감))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제중신편))이란 의서를 썼습니다. 의원으로 양주 목사까지 지냈으나, 1801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조의병을 잘못 치료했다는 죄로 의관들을 처형할 때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이태는 숙종때 어의를 지낸 인물로, 천연두와 홍역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책인 ((마진편))을 썼습니다. 유이태는 안산 군수로 임명되지만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돌아가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의술이 뛰어났던 그는 소설 때문에 자기보다 앞서 살았던 허준의 스승으로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유이태의 이름이 널리 퍼지자, 전국에서 그를 만나려는 환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유이태를 만나 보고 싶은 환자들의 간절한 바람이 모여 유이태 설화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어느날 길을 가던 유이태는 한 청년이 약을 달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약봉지에 '유이태탕'이라고 쓰여 있지 않겠습니까? 유이태가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청년은 병든 아버지를 위해 유이태를 찾아다녔으나 끝내 만날 수 없어 이렇게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이태는 청년의 정성에 감동해 아버지의 병을 말끔히 고쳐 주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이 조선시대 최고의 명의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현대 의학을 연구하는 발판이 된 조선시대 의학기술의 능력에 감탄할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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