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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5대 임금인 무령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그당시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청동은 구리에 주석 따위를 섞어 만든 금속입니다. 구리의 녹는점은 약 1,084℃로, 철의 녹는 점인 1,535℃보다 450℃ 정도가 낮습니다. 철보다 구리가 많이 들어간 청동을 이용해 무기나 장신구를 만들 때 힘과 노력이 덜 들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철은 철광석 형태로 땅속 깊이 묻혀 있어 캐내기가 무척 힘들지만 구리는 비교적 얕은 곳에 묻혀 있어 캐내기가 쉬워 더 빨리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철을 발견한 뒤 철이 청동보다 휠씬 단단하여 무기나 농기구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더 많은 금속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머리꽂이와 같은 공예품은 왕족과 귀족의 소유물이였으며, 구리의 겉면에 금을 입혀 만든 금동공예품이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불상이 금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호화로운 금속공예기술이 더욱 더 발달하여 금속공예품을 만드는 여러 방법들이 아래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 주조법 : 거푸집에 금속 녹인 것을 부어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방법

  * 단조법 : 금속을 불에 달궈 말랑말랑하게 한 뒤 망치로 두들겨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방법

  * 투조법 : 금속판에 원하는 모양을 그려 놓고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을 모두 오래내는 방법

  * 타출법 : 원하는 무늬가 그려진 틀 위에 금속판을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겨 무늬를 새기는 방법

  * 누금법 : 공예품에 금실이나 금 알갱이를 덧붙여 화려함을 더하는 방법

  * 삼감법 : 금속판에 원하는 무늬를 그린 뒤 그 부분을 파내고 다른 금속으로 채워 넣는 방법

 

삼국시대에서는 학문이 높거나 기술이 뛰어난 사람에게 박사라는 벼슬을 내려 주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영양왕 11년(600)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역사책(신집)을 편찬했고, 신라에서는 신문왕 2년(682)에 최고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세우고 박사를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30년(375)에 박사 고흥이 역사책 ((서기))를 편찬했으며, 오경박사, 역박사, 의박사 같은 여러박사를 두어 전문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서울의 아차산성은 고구려 영양왕 때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려고 격렬히 싸운 전쟁터입니다. 고구려 병사들이 쓰던 칼, 도끼 화살촉, 낫같은 철기 유물들이 발굴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특히, 철재 화살촉은 탄소 함령이 0.86%로 오늘날 공구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강철과 맞먹을 만큼 강도가 높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구려의 철기 기술은 크게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옛 가야 땅에서 나온 철갑옷은 70여 벌로 이제껏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철갑옷의 90% 정도를 차지합니다. 초기에 가야 연맹을 이끌었던 금관가야는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김해라는 말에는 '철의바다'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가야는 풍부한 철과 발달된 해상교통을 바탕으로 낙랑과 왜를 이어 중계 무역(다른 나라에서 사들인 물건을 또 다른 나라에 팔아 돈을 버는 무역)을 하여 큰 이익을 보았다고 합니다.

 

신라 금관은 넓은 띠에 화려한 장식을 세워 만든 게 많습니다. 대개 금관 앞에 산모양을 3~4단으로 올리고 뒤에는 사슴뿔 모양을 비스듬히 붙였다고 합니다. 금관 양쪽에는 금 알갱이가 오밀조밀 붙은 드리개를 늘어뜨렸습니다. 나비모양 장식을 주로 붙였는데 때때로 산이나 사슴뿔 기둥에 푸른빛 나는 반달모양 옥 장식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뛰어난 금 공예기술 덕에 신라 금관은 세계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금속공예푸은 그 수가 적고 값도 비싸기 때문에 백성들은 금속공예품을 쓸수 없고 주로 지배 계층이 권위를 드러낼때나 불교 예식을 치를 때 이용했다고 합니다.

 

비천상이 새겨진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에 나아 있는 가장 큰 종으로, 통일 신라 시대의 빛나는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 입니다. 신라 제35대 임금 경덕왕은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 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아들인 혜공왕이 경덕왕의 뜻을 이어 771년에 성덕대왕 신종을 완성했습니다. 성덕대왕 신종은 처음에 봉덕사라는 절에 걸려 있었다고 해서 '봉덕사종' 이라고도 합니다. 또 아기를 시주받아 쇳물에 넣어 종을 만들었다는 전설 때문에 종소리가 어마를 찾는 아기의 울음소리같다하여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립니다. 성덕대왕 신종의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가 띠처럼 조각되어 있는데 덩굴무늬 사이사이에는 탐스러운 연꽃이 피어 있습니다. 종의 몸통에는 그윽한 종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는 것처럼 성덕왕의 공덕이 벌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장자체가 명문이며 글자를 새긴 금속공예기술 또한 훌륭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종을 칠 때 망치가 닿는 자리인 당좌는 아름다운 연꽃 모양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평화로운 극락 세상을 뜻하기에 절, 불상, 종 따위에 많이 쓰입니다. 한편 성덕대왕 신종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비천상(하늘나라에 살며 세상을 오가는 여자 선인을 조각한 것)은 연꽃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그 둘레를 덩굴무늬가 감싸고 있습니다. 성덕대왕 신종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우아하고 신비한 비천상에 눈길이 간다고 합니다.

미소를 띤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머리에 삼면의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다고 해서 삼산관 반가 사유상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불상처럼 오른 다리를 완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을 받쳐 빰에 대고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는 부처를 조각한 것을 흔히 '반가 사유상'이라고 합니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얼굴전체에는 자비로운 표정이 퍼져 있습니다. 불상의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주름 하나하나까지 섬세히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삼국 시대의 금속 공예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불상은 일본의 국보 제1호인 고류 사의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놀랄 만큼 닮았습니다. 이일을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당시 문화발달 수준에 비추어 보면 일본이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위와 같이 우리조상들의 놀랍고 아름다운 금속공예품의 과학 기술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더 우리조상의 얼을 본받아 금속공예의 과학기술력을 보존하고 발달시켰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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