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연현상을 연구하고 오랜 경험을 통하여 많은것을 알게 됩니다. 우주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도 과학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별의 움직임으로 자연의 변화를 읽고 농사에 참고하였습니다. 북한 평안남도 증상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용덕리 고인돌은 기원전 2900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고인돌에는 큰 곰자리, 작은곰자리, 사냥개자리 등 11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첨성대는 현재 남아 있는 천문대 가운데 동양에서 가장오래된 것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황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천문대로 신라 왕궁터인 반월성의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국보 제31호이며,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첨성대는 하늘을 관측하는 곳일뿐 아니라 하늘을 본떠 세운 건물이라서 구조가 특별합니다. 첨성대의 받침은 정사각형이고 몸통은 원기둥인데 그것은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첨성대는 360여 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돌의 수는 1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원통부 27단과 맨 위 정자석까지 합해 28단이며, 동양의 기본 별자리와 그 수가 똑같다고 합니다. 첨성대는 맨 아래의 기단부, 술병모양의원통부, 맨 위의 우물 정자 모양의 정자석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단부는 기단석이 2단으로 쌓여 있으며, 원통부는 중앙의 창문을 기준으로 위아래 각각 12단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일 년 12달 24절기를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꼭대기의 정자석은 2단으로 짜여 있는데 정자석 위에 천문 기기를 놓고 별의 움직임을 살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이라 해서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도 왕실이 직접 맡아보며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게다가 삼국 모두 농업을 중시해서 날씨를 예측하는 천문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덕흥리 벽화 고분 각저총, 무용총 같은 무덤을 만들 때 벽에 별자리 또는 별을 뜻하는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쉽게 눈에 띄는 삼족오는 다리 셋 달린 까마귀로 태양을 뜻하며, 두꺼비는 달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또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통틀어 사신이라하는데, 동서남북 4방위를 뜻합니다. 사신은 별자리와 자주 어울려 그려졌습니다. 백제도 역법(해, 달, 별 같은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 한 해와 절기나 달을 정하는 방법)을 일본에게 전하고 천문대를 세워 줄 만큼 천문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이시대에는 과학과 종교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천문학자가 앞날을 예측하는 점쟁이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선덕여왕 때인 647년 상대동(신라 때 으뜸 벼슬로, 화백과 같은 귀족 회의와 의장을 겸했음)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비담의 반란군이 명활성을 점령하자, 김유신 장군이 진압에 나섰지만 전투가 벌어진 지 10일이 지나도록 승부는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별똥이 떨어진 모습을 보고 별이 떨어진 곳에서 피를 흘린다 하며 여왕이 패할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유신 장군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하여 연에 불을 붙여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보이게 하여 승리로 이끌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시대 무렵에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천문 기록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가 가장 정확한 천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단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천문 기술로 측정해 보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의 천문 기록은 약 80%가 정확한데, 비슷한 시기의 중국 역사책은 63~78%, 일본 역사책은 35% 정도만 맞는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에 일식 날짜를 예측했으며, 백제는 일본에 역박사(백제에서 역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주던 명칭)를 보내 천문 지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백제 무왕 3년(602)에는 승려관륵이 일본에 건너가 역볍과 천문 자리를 가르쳤습니다. 일본 최초의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든 사람도 백제 장인이었다고 합니다.
첨성대 하면 신라의 경주 첨성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사실은 신라뿐아니라 고구려, 조선에도 첨성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조선 단종 때 펴낸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못가에 첨성대가 있었다'라는 내용이 있고, 중종 때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터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라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도음인 평양에 첨성대를 세웠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첨성대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고 첨성대 터도 발국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제가 일본에 발달된 역법을 전해 준 사실에 비추어 보면, 백제에도 첨성대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려도 첨성대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개성 만월대(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 터) 서쪽에 세워진 건축물에 첨성대라고 전하여 내려왔습니다. 또 서운관 같은 관청을 세워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려에도 첨성대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세종 때인 1420년에 첨성대를 세웠으며, 서운관을 확대해 기상을 좀 더 정확히 관찰하려고 애썼습니다. 간의를 비롯한 10여 종의 천문 기기를 만들어 하늘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관측했습니다. 그리고 1715년에는 경희궁 개양 문 밖에 천문을 살피는 관천대라는 건축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경주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별을 관측하기 위해 세운 천문대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다, 불교 건축물이다, 수학적 기념물이다 등과 같은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면 평평한 들판이 아닌 하늘과 가까운 산꼭대기에 세워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별의 움직임을 좀 더 정확히 관찰할 수 있지 않냐고 되묻습니다. 하지만 첨성대는 천문대뿐만 아니라 천문을 읽어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대 역할을 함께 했습니다. ((삼국유사))에 경주 첨성대가 점성대라고 씌어 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또 역관(천문을 관측하고 역법을 담당하던 벼슬)이 첨성대에서 알아낸 점괘를 임금에게 되도록 빨리 전달하려면 첨성대를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이 아니라 궁궐과 가까운 곳에 세우는 게 당연하지 않을 생각 합니다.
위와 같이 신비로운 첨성대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이글을 참고하여 보다 알찬 과학지식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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