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들레 2022. 3. 1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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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은 말 그대로 불이 붙는 약이란 뜻인데, 나침반. 종이. 인쇄술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품입니다.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 약을 만들려다 실수로 화약을 발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약의 발명 시기는 불명확한데 7~8세기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은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고려가 언제부터 화약을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을 통해 꽤 일찍부터 화약을 이용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숙종 9년(1104)에 여진족을 징벌하기 위해 별무반이란 군대를 만들었는데 적진에 불을 지르는 발화군이 있었습니다. 인종 13년(1135)에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화구를 던져 성벽을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발화군은 화약을 다루는 군인을 일컬었고, 화구는 화약 무기였을 것입니다.

 

최무선은 왜구에게 고려 백성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화약과 화포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최무선이 어렸을때부터 고려에서도 화약을 사용하고는 있었습니다. 몽골이 송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기초적인 화약 무기를 사용했고 몽골의 일본 원정에 고려군이 적극 참여한 점과 고려 초의 기록에서 화약과 유사한 형태의 폭발이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이미 최무선 시기에 화약이라는 것은 고려에서도 익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신기전 *



당시 흑색화약의 주요 재료는 염초(질산칼륨), 황, 목탄(숯)인데 이 중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염초였습니다. 숯이야 말할 것도 없고, 황도 천연 재료인 데다 예로부터 사용해 왔기에 특별할 게 없는 재료였지만, 염초는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되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질산칼륨으로 정제하는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약 제작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주요 제조국이었던 중국이 최신 무기인 화약을 무작정 주변국들에게 공급 할리가 없었고, 제조법을 철저하게 국가기밀로 다루어 숨기고 완성된 화약만을 주변국에 판매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기밀이 아니었던 문익점의 목화 드립에 비하면 훨씬 엄중한 기밀인 중국의 화약 계통 기술서에는 재료만 소개할 뿐 방법은 모든 재료를 적절한 양으로 적절하게 섞은 다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고려의 국체를 보전해 주는 대신 고려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던 몽골이 고려가 화약을 개발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최무선은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제조법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최무선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끝에 염초, 유황, 목탕을 섞는 비율을 알아내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최무선의 건의로 우왕 때인 1377년에 화약과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이 세워졌습니다.

화통도감을 통하여 최무선은 주화, 화포, 화전 같은 여러 종류의 화약 무기를 발명하고 화약을 다루는 특수 부대인 화통 방사군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던 1380년에 왜구가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금강 화류의 진포로 침입하자 무왕은 나세를 사령관으로 삼아 최무선과 함께 100여 척의 함대로 왜구를 물리치게 했다고 합니다.

 

고려군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 덕분에 전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고 합니다. 이를 진포대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으로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반대파의 손에 화약 무기가 들어갈까 두려워 1389년에 화통도감을 폐지했다고 합니다.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고 1395년의 어느 날 최무선은 화약수련법이라는 책을 남기고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세종의 지원과 이천, 최해산 등의 노력으로 조선의 화약 무기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합니다. 한 번에 화살 여러 개를 넣고 쏠 수 있는 일발 다전포가 만들어지고 세종 27년(1445)에는 화약 무기를 대대적으로 개량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세종30년(1448)에는 주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신기전이 나왔으며, 문종 1년(1451)에는 한번에 신기전 1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화차가 발명되었다고 합니다. 신기전이라는 영화도 제작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 우리의 화약기술을 자랑하였습니다.

 

조선은 제3대 임금 태종 때부터 화약과 무기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태종은 나라의 힘을 기르려면 화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해산을 등용하여 화약 연구에 다시 불을 붙였던 것입니다. 1404년(태종 4)에는 화통 방사군을 늘리고 1407년에는 군기감에 화약 장인 33명을 배치하여 화약을 만들게 했습니다. 또한, 1415년에는 화약감조청이란 화약 만드는 관청을 세웠는데 조선은 건국초 보다 화약 보유량이 1,000배 정도 늘어났습니다. 세종은 북방 개척으로 화약 소비량이 늘자, 중앙 관청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화약을 만들게 했습니다. 1445년(세종 27)에는 비밀리에 사표국을 세워 염초를 달이게 했습니다. 한편 문종은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완구와 철신포 등 화약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1450년에는 염초를 달이는 임시 관청인 자초도회소를 전국에 25개나 두고, 나라에서 인정한 화약 장인만 염초를 만들게 한 뒤 나라에 다 바치게 했습니다. 이처럼 태종, 세종, 문종 대에 화약제조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는데, 명나라도 이를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 비격진천회 *

                                                         

1592년(선조 25)에 임지왜란이 일어나자, 군기시에서 화포를 만들던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만들었습니다. 비격진천뢰는 무쇠로 만든 둥근 박 모양의 폭탄으로 화포의 하나인 완구에 넣어 발사했습니다. 비격진천뢰 안에는 대나무 통, 철 조각, 화약 가루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대나무 통에는 비격진천뢰의 핵심 부분인 목곡이 있었는데 목곡은 심지를 소라 껍데기처럼 빙빙 감싸고 있었습니다. 비격진천뢰는 목곡의 길이를 달리함으로써 폭파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경상죄도 병마절도사 박진과 경주 부윤 박의장은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써서 왜군에게 빼앗겼던 경주성을 되찾기도 했습니다. 왜군은 경주성 안에 떨어진 비격진천뢰의 구조나 기능을 잘 몰라,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폭발하여 큰 피해를 입자 놀라서 성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수군 역시 배에 완구를 설치해 비격진천뢰를 쏘아 많은 왜선을 격침시켰습니다.

 

위와 같이 우리나라의 화약기술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우리 조상의 놀라운 화약 기술력에 감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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